2. 방송사는 자신의 고객이 누군지 모른다
자신의 고객이 누구냐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문제
비즈니스의 처음과 끝은 ‘고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모든 기업은 고객의 니즈가 무엇인지 파악하려 애쓰고 고객의 요청이 있으면 어떻게 대응할지 고심한다. 더구나 소비재를 생산, 유통하는 기업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지상파)방송사의 고객은 누구일까. 방송사의 (광고)비즈니스 모델을 단순히 표현하자면 이렇다. ① 볼만한 콘텐츠를 제작 송출하여 불특정 다수의 시선을 확보한다. ② 확보한 불특정 다수의 시선을 필요로 하는 광고주에게 대행사를 통해서 판매한다.
방송사에 근무하는 몇몇 지인에게 ‘방송사의 (광고 비즈니스) 고객이 누구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이때 돌아왔던 대부분의 대답은 둘중 하나였다. ‘시청자’ 아니면 ‘광고주’. 그런데 둘 다 ‘고객’이 될 수 없다. 먼저 ‘시청자’를 보자. 일반적인 의미에서 고객과 기업은 니즈를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을 제시하면서 관계가 형성된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고객’이 특정된다. 니즈를 파악하는 단계에서는 ‘잠재 고객’이지만, 일단 ‘잠재 고객’이 상품을 구매하면서 관계가 만들어지면 ‘진짜 고객’이 된다. ‘시청자’는 어떨까. 방송사가 제공하는 콘텐츠를 소비할 수도 있는 사람들의 전체 모집단(기업으로 치자면 모든 잠재고객)을 지칭할 때도 ‘시청자’고, 콘텐츠를 소비하고 난 이후에도 ‘시청자’다.
어떤 사람이 콘텐츠를 소비하더라도 그것을 제공한 방송사와 특정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방송사로서는 특정 집단으로서의 ‘고객’을 알아낼 수가 없다. 이것은 ‘방송'(특히 지상파)의 미디어 차원의 특징이다. 지상파는 쌍방향성을 구현하기 어렵다. 방송사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고객과의 접점이 없다. ‘시청자’는 방송사가 ‘고객’을 특정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상품(콘텐츠)을 소비하는 사람들을 편의상 두루뭉술하게 지칭하는 용어다.
‘광고주’는 어떨까. 비즈니스 모델상 광고주는 방송사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존재다. 광고 비즈니스 모델은 특이하게도 상품(콘텐츠)을 소비하는 주체와 대가를 지불하는 주체(광고주)가 다르다. 광고주에게 대가를 받는 기준은 ‘크기’다. 콘텐츠를 소비한 전체 집단의 크기(시청율이라 하자)가 됐든, 특정 연령대 집단의 크기(예를 들어, 20~49세 집단의 시청율)가 됐든, 전체적인 반응의 크기(예를 들어, 소셜 미디어 등에서 얼마나 사람들이 언급하는 지)가 반영되든 마찬가지다. 크기가 중요하지 개별적인 관계가 어떤지, 앞으로 이 관계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는 상관없다.
광고료를 받는 토대는 콘텐츠의 소비자로부터 나오지만, 실제 대가는 광고주로부터 받기 때문에 방송사 입장에서는 광고주를 고객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콘텐츠를 다른 사업자에게 판매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방송사가 가지고 있는 콘텐츠를 다른 사업자에게 판매하는 경우도 사업자에게 대가를 받지 최종 소비자에게 직접 받지 않는다. 대가를 지불하는 광고주나 다른 사업자가 방송사의 고객인가, 콘텐츠 소비자가 고객인가.
‘소비자는 콘텐츠만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의미
두 가지의 문제(고객과의 접점이 없고, 대가를 소비자가 아니라 광고주로부터 받는다)가 결합하면 방송사가 고객이 누군지 모른다는 문제를 만든다. 고객을 모른다는 문제는 다양한 현실적인 문제와 연관된다.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려면, ‘소비자는 콘텐츠만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콘텐츠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미디어와 결합해야만 소비자와 만날 수 있다. 선사시대 벽화도 벽이라는 미디어와 그림이라는 콘텐츠가 결합되어 존재한다. 책도 종이라는 미디어에 콘텐츠로서의 이야기가 결합된 형태다. 현재 존재하는 영상 콘텐츠들도 다양한 미디어와 결합되어 제공된다. 콘텐츠를 소비할 때 콘텐츠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가치(재미, 감동, 교육, 정보 등)는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특성(지상파 특성, IPTV 특성, 모바일 특성 등등)과 결합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필연이다.
소비자가 PC를 통해서 유튜브에서 방송 프로그램 하이라이트 영상을 소비하는 것을 상정해 보자. 이 소비자는 방송 프로그램 하이라이트 영상이라고 하는 콘텐츠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다. 통신 서비스 + PC의 OS(Windows) + 유튜브 + 프로그램 하이라이트 영상이라는 ‘집합’을 소비하는 것이다. 통신과 PC라는 미디어(혹은 디바이스)와 유튜브라는 서비스와 결합된 영상을 소비한다. 어떤 경로(미디어)롤 통해서 콘텐츠를 소비하느냐에 따라 소비자는 콘텐츠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가치(재미, 감동, 교육, 정보)뿐만 아니라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가치가 결합된 ‘가치 집합(Value Set)’을 소비한다. 이 상황을 일반화 하면 아래의 그림과 같다.

Core Value는 콘텐츠 자체가 주는 가치이다. Core Value는 미디어(혹은 서비스)가 제공하는 Shell Value와 결합되어 제공된다. Shell Value는 미디어가 제공하는 가치다. 내가 드라마를 지상파 방송을 통해서 본다면 무료로 볼 것이다. 케이블 채널이나 넷플릭스를 통해서 본다면 월정액을 지불한다. 미디어가 제공하는 경제적 가치가 다른 것이다. 유튜브를 스마트폰으로 지하철에서도 편리하게 본다면, PC를 통해서 보는 것보다는 편리성 가치가 올라갈 것이다. 댓글을 달 수 있는 미디어를 이용한다면 한 번 보고 끝나는 미디어에 비해 쌍방향성 가치가 다를 것이다. 게임 이용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트위치 같은 서비스는 다른 서비스에 비해 사회적 가치가 높다(게임 이용자들과 교류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나보다 더 잘 아는 넷플릭스는 높은 개인화 가치를 제공한다.
다시 방송사 문제로 돌아와 보자. 방송사가 지상파를 통해서(케이블이나 IPTV를 통해서 콘텐츠를 제공하는 경우도 대동소이) 콘텐츠를 제공할 때 제공하는 가치는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콘텐츠가 가지고 있는 본원적 가치는 다른 미디어를 통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TV는 다른 미디어에 비해 큰 화면을 제공하므로 콘텐츠의 재미와 감동이 증가할 수 있지만, PC나 모바일도 TV와 연동이 가능하므로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TV가 없으면 콘텐츠를 볼 수 없고(큰 화면을 통해서 볼 때 편리성 가치는 높으나, 시간과 장소에 관련된 편리성 가치가 떨어진다), 드라마를 보고 감상을 표현할 수도 없고(쌍방향성 가치가 떨어진다), 나만의 서비스를 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고(개인화 가치가 낮다),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방법도 없다(사회적 가치도 낮다). 경제적 가치도 크게 나을 것이 없다(지상파를 통하면 무료이지만, 소비자 대부분은 케이블이나 IPTV같은 유료 서비스에 가입한다).
이런 상황에 변화를 주려면, 방송 서비스가 이용하는 미디어(지상파, 케이블, IPTV, 위성방송)에 쌍방향성을 구현하고, 개인화 서비스를 도입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할테지만 미디어의 특성상 어려운 일이다. 방송사가 다른 미디어를 소유하는 경우는 어떨까. 방송사가 OTT 서비스를 소유하거나 인수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방송사가 OTT 서비스를 인수하는 것은 어렵다. 이미 OTT 서비스들은 몸집이 방송사들과 비할 바가 아니다. 방송사들이 모여서 ‘pooq'(현재의 WAVVE)을 만들었지만 이것도 여의치 않다(이 문제는 다음에 다시 살펴볼 것이다). 다른 서비스와 연계해서 소비자에게 새로운 가치를 전달하고 싶다. 하지만 SNS 서비스의 소유권은 방송사에 있지 않고, 방송사는 재료만을 제공해 줄 수 있을 뿐 사람들의 활동과 관련된 데이터도 제대로 얻을 수 없다. 고객을 잘 모르는 방송사가 고객을 알려고 변하고 싶어도 쉽지 않은 형국이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어떤 정육업자가 있었다. 이 정육업자는 매년 명절 선물로 갈비세트를 만들어 판다. 구매자는 선물을 보내고자 하는 기업들이고, 소비자는 그 선물을 받는 사람들이다. 매년 갈비세트는 무난하고 고급진 이미지가 있어 잘 팔리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상황이 변한다. 소비자들이 갈비세트 외에 스테이크 세트, 특수부위 세트 등을 원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신생 정육업자는 이러한 상황을 알아차리고 웹사이트를 개설하고 상품권을 발행하기 시작한다. 소비자들은 웹사이트에서 갈비세트 외에도 원하는 상품을 고를 수 있었고, 이는 선물로 받은 상품권을 이용하면 가능하다. 편리함을 인식한 소비자들은 상품권을 선호하기 시작한다. 갈비세트를 구매하던 기업들은 상품권을 구매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갈비세트를 기업에게 판매하는 것이 매출의 대부분이었던 정육업자는 기존 사업을 유지하면서 상품권 발행 사업으로 영역을 넓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려면 웹사이트도 개설해야 하고, 상품도 다양하게 구비해야 하고, 상품권을 발행하고 유통하는 시스템도 갖춰야 한다. 하지만 신생 정육업자들이 이미 웹사이트 사업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많은 고객들이 편리한 웹사이트로 옮겨간 상황이다. 이제는 웹사이트 사업을 추진하려니 돈이 엄청나게 들 것같다. 신생 정육업자들은 웹사이트를 통해서 고객과 직접 상대하면서 고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이해 수준이 올라갔다. 새로운 상품도 기획하고, 고객 불만에 대한 대응도 확실하게 처리한다. 기존 정육업자는 떨어진 갈비세트 매출을 다시 올리기가 쉽지 않다고 느낀다. 예전에는 품질좋은 갈비세트만 잘 조달하면 사업은 저절로 잘 굴러갔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너무 많이 변했다.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머리 속이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