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방송사들은 어려움에 직면했을까요?(1)

1. 지상파 위기가 회자된지 어언 20년

1.1 비유적인 이야기부터

KR이라는 이름의 한 도시가 있었다. 인구는 10만 정도. 도시에는 K, M, S 세 개의 수퍼마켓이 있다. 모두 시청의 허가를 받고 영업하는 업체다. 수퍼마켓에는 다양한 물건이 구비되어 있다. 일상용품, 식료품, 인테리어 용품, 가전제품까지. 이 수퍼마켓의 물건들은 공짜다. 하지만 이 수퍼마켓을 이용하려면 조건이 있다. 그것은 수퍼마켓 입구에 배치되어 있는 커다란 게시판을 10분간 봐야 하는 것이다. 게시판에는 시내의 각종 뉴스, 다양한 사업자들의 광고, 시청에서 게시하는 홍보 자료 등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수퍼마켓들이 무료로 물건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게시판 운영권을 시청에서 부여했기 때문이다.

KR시에서는 사업자들이 자신들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알리려면 수퍼마켓에서 운영하는 게시판을 이용하거나 소식지를 발행하는 몇몇 업체에게 의뢰하는 방법밖에 없다. 소식지를 이용하려면 월정액을 내고 회원으로 가입해야 하고, 각 소식지 업체가 보유하고 있는 회원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에 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광고를 하려면 수퍼마켓에서 운영하는 게시판을 이용해야 한다. 세 개의 수퍼마켓은 게시판을 운영하면서 대가로 받는 게재 수수료를 기반으로 물건들을 무료로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시간을 들여야 하고 직접 찾아가야 하는 불편함은 있지만, 그렇게 큰 문제없이 KR시는 평화롭게 굴러가는 듯했다. 그러다 조금씩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시작은 이랬다. KR시의 관문 역할을 하는 대로가 있었는데, 이 대로 옆에 어떤 사업자가 전광판을 설치한 것이다. KR시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전광판이 설치되니 사람들은 오며가며 전광판을 한번씩 쳐다보게 되었다. 이 전광판은 대로 옆 나대지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잡초가 무성한 땅이어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임대료가 저렴해서 나대지를 관리하는 업체에 약간의 임대료만 내면 되었다. 시청에서도 전광판을 설치한 업체에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오며가며 사람들이 전광판을 쳐다볼 것이라고 예상한 업체에서는 전광판에 소식지 업체에서 제공하는 소식들을 싣기 시작했다. 전광판 밑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운영하는 동아리(커피 모임, 독서 모임, 조기 축구 모임 등등)에 대한 내용을 쪽지에 적어 담을 수 있는 커다란 바구니를 제공했다. 또다른 바구니에는 사람들이 관심있는 사안들을 적어서 담을 수 있도록 했다. 사람들이 지나가다 바구니 안에 있는 쪽지들을 보고, 자신들의 의견도 적어서 원래의 쪽지 밑에 계속 붙여나갈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어떤 쪽지들은 길이가 계속 늘어났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전광판을 보게 되고, 바구니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늘어나자 K, M, S 수퍼마켓의 게시판을 이용하던 사업자들이 전광판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소식지 업체들은 자신들의 소식지 내용들을 무단으로 전광판에 올리는 업체와 다투고 있었으나, 전광판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감지하고, 전광판 업체와 자신들의 소식지 내용을 제공하면서 대가를 받는 걸로 협상을 한 터였다.

한편, 전광판 업체는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사업 기반도 어느 정도 잡아가자 전광판이 위치한 나대지 옆에 널찍하게 터를 닦아 벼룩시장을 개설했다. 이 시장에서는 누구든 물건을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었고, 약간의 수수료만 전광판 업체에 지불하면 됐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니, K, M, S 수퍼마켓 게시판을 이용하던 사업자들이 전광판 업체로 이동하는 규모도 점점 커져갔다. 수퍼마켓들은 당혹감에 휩싸였다. 게시판을 운영해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게시판 운영 수입이 줄어들면, 무료로 제공하는 상품들을 지금처럼 제공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수퍼마켓 업체들은 공동으로 시청을 상대로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입구에만 설치하고 운영이 가능했던 게시판을 수퍼마켓 내부에도 따로 설치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수퍼마켓 이용자들이 입구에서도 게시판을 보고 수퍼마켓 내부에서도 게시판을 보게될 것이니, 줄어드는 게시판 운영 수입을 벌충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다음 번 타자는 ‘Net 마트’였다. 이 업체는 다른 도시에서 큰 성공을 거둬 자본력이 탄탄하다고 정평이 난 업체였다. 이 업체가 KR시에 진출한 것이다. 이 업체는 게시판을 운영하지 않았다. 따라서 시청의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이 KR시에 진출할 수 있었다. Net 마트도 K, M, S와 비슷하게 다양한 물건들을 구비하고 있었다. 차이는, 이 업체는 다른 도시의 특산물들도 다량 구비하고 있다는 것과 회원제로 운영한다는 것이었다. 월정액을 내면 그 달에는 마트에서 물건을 가져갈 수 있다. 처음에는 Net마트가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다른 도시의 특산품들이 KR시에서도 잘 먹힐거라고 보고 회원들이 많이 가입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Net 마트는 KR시에서 잘 팔리는 물건을 K, M, S 수퍼마켓에 납품하는 업체들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몇몇 납품 업체들에게 가격을 후하게 쳐주고 Net마트에만 물건을 공급하게 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다른 한편 K, M, S 수퍼마켓과도 접촉하여 대가를 지불하고 몇몇 상품들은 Net 마트에서도 판매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게시판 운영 수입의 감소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수퍼마켓들은 새로운 수입이 생기니 거부하지 않고 거래를 받아들였다.

시간이 좀 지나자 Net 마트에 소비자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KR시의 상품들 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의 상품들까지 구색이 넓은 것이 큰 장점이었다. Net 마트는 다른 장점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Net 마트가 회원들의 주소를 알고 있고, 회원들이 마트에서 어떤 물건을 가지고 갔는지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수퍼마켓들과 가장 큰 차이점이다. 수퍼마켓들은 게시판을 운영해서 수입을 얻었기 때문에 수퍼마켓 이용자들이 누구인지, 어떤 물건들을 들고 가는지 알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저 수퍼마켓 이용자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가가 중요했다. 이용자 규모에 따라 게시판을 이용하는 사업자들로부터 받는 대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Net 마트는 회원들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이용해서 이용자들에게 ‘이웃들은 이런 물건들을 많이 들고 가던데, 당신은 어떤가요’, ‘당신이 지난번에 이런 물건들을 가지고 갔었는데, 비슷한 물건들이 여기 있어요’ 등등의 쪽지를 이용자들이 마트에 들어설 때 나누어주곤 했다. 물건 종류도 다양한데다, 이런 서비스를 받은 이용자들의 상당수는 아무리 무료라고 해도 게시판을 이용하고, 직접 찾아가야 하는 불편함을 감내하느니, 월정액을 내더라고 Net 마트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Net 마트는 KR시의 특산품을 업체들로부터 납품받아 다른 도시들에 소개해서 큰 성공을 거뒀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런 소문은 수퍼마켓에 상품을 납품하던 업체들에게 전해졌고, 수퍼마켓보다 후한 가격을 쳐주는 Net 마트에 업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돈이 많이 들어가는 신상품을 개발하는 업체들은 재정적인 여력이 없는 수퍼마켓들을 찾아가지 않고 Net 마트를 찾아간다. 납품 업체들의 이탈은 수퍼마켓들에게 또다른 위협이었다. 수퍼마켓들에게는 납품 업체들에게 가능한 한 높은 가격을 제시해야 하는 부담도 생겼다. 예전처럼 매장을 구색맞춰 채우려면 돈이 훨씬 더 많이 들게 생겼다.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찾은 대안이 비싼 물건의 매대를 줄이고, 가능한 한 적은 돈을 들여서 이용자들을 모을 수 있는 ‘가성비 높은’ 상품들을 개발하며, 자기들도 다른 도시에 KR시의 특산물을 팔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는 일이다. 하지만 매대를 줄이면 당장은 돈을 절약할 수 있겠지만 한계가 있고, 가성비 높은 상품들은 개발을 하더라도 이 상품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용자들에게 먹히느냐가 중요하다. 이용자들에게 외면받으면 게시판을 운영하는 데도 지장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도시에 KR시의 특산물을 팔려면, 직접 다른 도시들에 진출하거나 다른 도시들의 사업자들과 협력해야 할텐데, 가능하기는 할까? 앞으로 수퍼마켓들은 어떻게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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