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역시 콘텐츠가 중요하다?

바야흐로 콘텐츠 전성시대다. 1990년대말 시작된 한류 열풍이 2020년대 들어 전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K-팝, K-드라마, 영화, 게임 뿐만 아니라 콘텐츠에 많은 영향을 받는 음식, 패션, 뷰티에 이르기까지 콘텐츠의 영향력이 넓어지고 있다.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인 신드롬을 만들어 낸 이후 콘텐츠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어찌보면 당연한 흐름이다. 콘텐츠는 중요하다. 이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글로벌 OTT 서비스들이 속속 국내에 진출하는 상황에서 OTT 서비스의 명암을 가르는 것은 오리지널 콘텐츠라는 것도 ‘상식’이 됐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의문이 든다. 오징어 게임의 엄청난 성공으로 인한 최대의 승자는 제작사가 아닌 OTT(유통사)인 넷플릭스라는 점에 대해 아쉬움을 얘기한다(그러면서 언론들은 우리 나라도 글로벌 OTT 서비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 됐다고 말한다). K-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세계적으로 K-팝을 유통하는 서비스는 스포티파이와 애플 뮤직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드라마와 K-팝과 같은 콘텐츠의 전세계적인 성공을 보면서 과거에 경험했던 일화들이 생각나는 것은 ‘역시 콘텐츠가 중요해’라는 차원이 아닌 복잡한 생각의 흐름에서였다.

예전의 경험들 – 음원 유통사업, UCC

2000년대 초반 나는 음원 유통 사업에 대한 기획서를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음원 유통 사업은 아티스트를 보유하고 음원을 제작하는 기획사와 음원 서비스 플랫폼을 연결하는 B2B 사업. 투자 및 구매를 통해서 기획사로부터 음원을 확보하고, 확보한 음원을 플랫폼에 유통함으로써 발생하는 수익을 정해진 조건에 따라 기획사와 배분). 그 사업을 추진하고자 하는 팀에서 작성한 기획서를 검토해서 의견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업 기획서의 내용은 새롭게 출시되는 음원들의 유통권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확보된 음원을 같은 사업을 하고 있는 회사들과 동일한 서비스(음원 유통 플랫폼, 예를 들어 멜론, 지니뮤직 등)를 통해서 배포하며, 이를 위해서는 00억원의 재원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주로 담겨 있었고, 이미 음원 유통사업을 하고 있는 회사들의 현황을 조사한 자료들이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이어지는 토론 시간에 몇몇 질문이 오갔다. 다른 회사보다 음원 유통권을 더 싸게 확보할 방법은 있나, 다른 회사들은 확보하기 어려운 음원들을 우리만 확보할 수 있나, 같은 음원에 대해서 다른 회사가 100원 어치를 팔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이상을 팔 수 있나, 확보한 음원들을 가지고 우리만의 음원 유통 채널을 확장시킬 수 있나 등등. 기획자의 대답은 일단 음원을 확보한다는 것은 독점적인 유통 사업권을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에 투자하는 재원이 많을수록 음원 유통 사업을 빠른 시일 내에 활성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많은 돈을 투자해서 다량의 음원 유통권(특히, 인기 가수나 그룹의 신규 발매 음원)을 확보하면 사업은 단기간 내에 궤도에 오를 수 있으니 결국 음원 유통권을 확보하기 위한 규모 있는 투자가 필수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돈만 많이 투자하면(그래서 콘텐츠를 대량 확보할 수 있다면) 사업은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다는 얘긴데, 정말 그럴까?

비슷한 시기(2000년대 초반) 웹서비스를 기획하는 팀에서 UCC(User Created Content) 서비스를 자체적으로 구축하겠다는 기획서를 검토하는 회의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용이 좀 이상했다. 지상파 방송사의 드라마를 재료로 필요한 영상 자르기, 말풍선 붙이기 등의 간단한 기능을 탑재하겠다는 것이 거의 내용의 전부였다. 이 서비스가 활성화되려면 이 내용으로는 무리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오갔다. 그 시기 이미 사용자들은 일반 포털의 커뮤니티 서비스 등에서 드라마 스틸컷 등을 이용한 UCC를 많이 만들고 있었다.

불법으로 유통되는 영상이나 사진 등을 이용해서 만드는 UCC는 우리 사이트에서 합법적인 정품 콘텐츠를 재료로 제공하면 당연히 우리 사이트의 사용자로 유입될 것이라고 기획자는 주장했다. 재료 영상이 합법적인 것이 차별화의 포인트라는 얘기였다. 서비스를 오픈했으나, 기대했던 사용자 유입은 일어나지 않았고, 아르바이트들을 활용해서 자체적으로 UCC 콘텐츠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몇 년 후 서비스를 접게 되었다. 결국 사용자들이 우리의 차별화 포인트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말의 전후좌우

위와 같은 경험들을 다시 생각해 보면서 ‘부의 기원(The Origin of Wealth)’에서 저자인 에릭 바인하커의 얘기가 떠오른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부(Wealth)는 새로운 기술에서부터 창출된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은 금융, 교육, 제도, 사업화 등등 다양한 사회적 기반과 진화적 과정에 의해 적합한 질서를 갖추게 된 결과물이다. 새로운 기술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고, 그 비중은 아마도 20% 정도일 것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새로운 기술’을 ‘콘텐츠’로 대체해도 비슷한 얘기가 되지 않을까. 콘텐츠에서부터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콘텐츠는 기술, 금융, 제도, 사업화, 전략 등등과 적절히 결합되지 않으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얘기는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상식적인 얘기다. 실제로도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사업적인 측면에서의 콘텐츠는 언제나 성공의 문을 열 수 있는 만능 키가 아니다. 어떤 ‘콘텐츠’가 성공했다고 해서 ‘콘텐츠 비즈니스’가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다. 콘텐츠의 성공과 콘텐츠 비즈니스의 성공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그럼에도 콘텐츠 비즈니스에서 콘텐츠의 중요성에만 방점이 찍히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마치 새로운 기술이 중요하다는 얘기처럼)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부인하기 어렵고, 성공 요인을 얘기하자니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일 수도 있고, 다른 요인들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자니 너무 범위가 넓어져서 요점이 없어 보일 수도 있고, 콘텐츠와 다른 성공요인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도 쉽지 않은 얘기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얘기는 상식적이고 쉬운 얘기지만, 다른 성공요인과 적절한 관계를 얘기하는 것은 쉽지 않고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하지만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얘기만으로는 콘텐츠 비즈니스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일반화할 수 있는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나만의 답을 찾기 위해서 여러 측면을 생각해 보는 것은 콘텐츠 비즈니스에서도 꼭 필요하다.

콘텐츠/미디어 비즈니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은 (지상파) 방송사들이 겪고 있는 상황에 집약되어 있다. 방송사들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콘텐츠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꺼리들이 있을 것이다. 이후에 콘텐츠 시장을 어떤 시각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얘기해 보고, 콘텐츠 비즈니스에서도 비즈니스 모델, 전략 이런 개념들과 어떻게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기회를 가져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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