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콘텐츠 시장을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할까
나는 여윳돈을 주식에 투자하기로 했다. 어느 종목에 투자할지를 결정하기 전에 유망한 산업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보기로 했다. IT 산업 전망에 대한 기사들을 꼼꼼히 읽어본다. 친구들과 앞으로 주목받을 새로운 산업들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투자대상으로 3개 종목을 정한다. ‘A전자’는 대형 제조업체로서 주식시장의 변동에도 주가가 안정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회사다. ‘B테크’는 IT기기 부품 제조업체인데, 규모는 중견기업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C바이오’는 신약을 개발하고 있는 바이오벤처 업체이다.
A전자 주식을 매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주식매매시스템에 접속해서 적당한 가격에 주문을 넣으면 체결된다. B테크와 C바이오는 조금 다르다. B테크는 주식거래량이 많지 않아서 매입 당일에도 주가가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상황을 보면서 B테크 주식도 원하는 만큼 성공적으로 매입했다. C바이오는 매입하려고 보니 신약 개발에 대한 기대로 최근 한달 동안 2배가 넘게 주가가 올랐다. 망설여진다. 하지만 신약이 성공적으로 개발되면 앞으로도 주가가 폭발적으로 오를 것이라 기대하고 매입한다. 주식에 투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온다. 바이오 업종의 회사들에 대한 주가 거품론이 등장했다. 앞으로 바이오 회사들의 투자가 줄어들 것이라는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바이오 회사들에 투자했던 투자자들이 주식을 매도하기 시작하면서 어떤 회사들은 주가가 폭락한다. 나도 약간 손해를 봤지만 C바이오 주식을 처분한다.
간단하게 주식시장에 참여하는 상황을 상정해 봤다. 주식 투자는 수많은 상호작용의 결과로 이루어진다. 투자 대상을 선정할 때 다른 구성원들이 내는 뉴스, 리포트 등을 참조하고 영향을 받는다. 특정 종목을 매입할 때도 같은 종목의 투자자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영향을 받는다. 내가 투자한 결과도 다른 사람들의 투자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나의 투자 의사결정과 투자 성적은 독립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식 시장은 독립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투자자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식시장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수많은 존재들로 이루어져 있다. 학자들은 이러한 시스템을 ‘복잡계 네트워크’라고 한다.
콘텐츠 시장도 복잡계 네트워크이다. 내가 어떤 콘텐츠를 볼지 여부를 결정할 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참조한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입소문, SNS상에서의 움직임 등은 나의 콘텐츠 소비 여부에 영향을 미친다. 콘텐츠 시장에서도 구성원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핵심은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다. 나는 친구에게 영향을 받고, 나는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영향을 주고받는 연결된 존재들이 구성하는 네트워크는 몇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가진다. 물리학자들이 얘기하는 복잡계의 공통적인 특징들중 의미 있는 몇 가지만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관계는 비선형적이다. 인풋과 아웃풋의 관계가 선형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작은 인풋으로 큰 아웃풋을 만들 수 있고, 반대로 큰 인풋으로 하찮은 아웃풋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를 제작할 때 제작비를 두 배 쓴다고 관객도 두 배로 늘지 않는다. 둘째, 복잡계는 개방형 동태적 시스템(Open Dynamic System)이다. 복잡계는 안정(균형)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 외부(환경)에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구성원이나 에너지가 들어오고 나갈 수 있다. 이에 따라 복잡계는 항상 동태적인 특징을 갖는다. 청소년이었다가 성인이 되어 19금 콘텐츠를 볼 수 있게 될 수도 있고, 새로운 드라마가 방송되어 이전에 방송하던 드라마 시청자를 일부 흡수할 수도 있다. 구성원들은 항상 변할 수 있으며, 구성원들의 반응도 예측하기 어렵다. 셋째, 복잡계는 창발적 현상(Emergence)을 갖는다. 창발적 현상은 구성원 각각을 분석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전체적인 특징이다. 구성원 한 명을(그 구성원이 대표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해도) 잘 분석한다고 해서 유행하는 ‘패션’을 예측할 수는 없다. 창발적 현상은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라는 말로 대표될 수 있다. 시장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구성원들을 분석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 넷째, 사건의 규모와 발생가능성은 (근사적으로) 멱함수 분포를 따른다.
콘텐츠 시장에서 흥행 성적은 독립적인 사건들이 아니다. A드라마와 B드라마의 흥행 성적은 주사위를 각각 던지는 독립적 사건과는 다르다. A드라마와 B드라마의 흥행 성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A드라마를 보고 내 친구에게 시청을 권유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감상평을 SNS에 올려 다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드라마를 시청하는냐는 개인이 독립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나 자신의 과거 행적 등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독립적인 사건들과 서로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대한 간단한 비교를 해 보자. 주사위를 각각 2번 던지는 것과 주사위를 1번 던지고 그 결과를 2배로 하는 것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첫번째 방법은 각각 주사위를 두번 던졌으니 독립적 행위이고, 두번째 방법은 2회차 주사위 숫자가 전적으로 1회차 주사위 숫자에 달려있다(즉, 독립적이지 않고 서로 연관된 행위다). 첫번째 방법과 두번째 방법의 주사위 숫자 합의 분포를 보자. 첫번째 숫자 합의 분포에서 양극단의 확률은 1/18이다(합이 2가 나오거나 12가 나오는 경우의 수를 세보면 알 수 있다). 반면, 두번째 방법에서 양극단의 확률은 1/3이다(여기서는 3, 5, 7 등의 홀수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양극단의 확률이 높아진다).
독립적 사건들은 극단적 사건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반면, 연관된(종속적) 사건들은 극단적 사건의 가능성을 증폭시킨다. 이것이 멱함수 분포의 특징이다. 콘텐츠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어떨까. 콘텐츠의 흥행 성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시청을 했느냐는 결과이다. 사람들은 각각이 철저한 개인주의자로서 서로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존재가 아니고, 그렇다고 한몸처럼 움직이는 존재도 아니다. 아마도 콘텐츠 시장은 완전히 독립적이지도, 완전히 종속적이지도 않은 중간 어딘가에 해당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특성이 주식시장과 콘텐츠 시장이 동일하게 복잡계 네트워크적인 특징을 공유하는 이유이다.
복잡계의 중요한 특징인 멱함수 분포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자. 독립적인 사건들은 정규분포를 따른다. 복잡계의 사건들은 멱함수 분포를 따른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주식시장의 급등락 규모의 분포, 지진의 크기에 따른 분포, 연간 소득 금액 분포, 전쟁에 따른 사망자 규모의 분포 등등이 멱함수 분포를 나타내고 있다. 정규분포와 멱함수 분포의 차이를 그림으로 보면 아래와 같다.

정규분포와 멱함수 분포의 결정적 차이점은 ‘커다란 변화’의 존재가능성 차이다. 정규분포에서는 ‘커다란 변화’의 가능성이 극적으로 줄어들어,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확률로 급격히 떨어진다. 반면, 멱함수 분포는 ‘커다란 변화’의 가능성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일어날 수도 있는’ 확률을 유지한다(위의 그림에서 정규 분포 곡선은 오른쪽으로 갈수록 확률이 급격하게 줄어들지만, 멱법칙 분포는 오른쪽으로 갈수록 확률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정규 분포 곡선보다 길고 두꺼운 꼬리 모양을 가진다). 정규분포를 따르는 ‘키 분포’에서 3m가 넘는 사람이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확률을 갖지만, 주식시장이나 콘텐츠 시장에서는(즉, 멱법칙 분포에서는) 대박이나 쪽박이 ‘일어날 수도 있는’ 확률로 존재한다. 정규분포에서는 평균에서부터 표준편차의 2배, 3배로 거리가 멀어질수록 급격하게 확률이 떨어진다. 표준편차의 4배 정도만 되도 거의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의 확률 수준으로 떨어진다. 멱함수 분포에서는 중앙값보다 5배 이상, 10배 까지 멀어져도 ‘일어날 수도 있는’ 확률을 유지한다. 멱함수 분포에서는 ‘평균’과 ‘표준편차’의 의미가 없어진다. ‘평균’ 수준에서 돈을 벌고 있었어도 ‘커다란 사건’이 한 번 일어나면 그동안 벌어놨던 수입을 한꺼번에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복잡계의 특성인 ‘창발성’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창발(創發)또는 떠오름 현상은 하위 계층(구성 요소)에는 없는 특성이나 행동이 상위 계층(전체 구조)에서 자발적으로 돌연히 출현하는 현상을 말한다.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라는 말로 대표될 수 있는 창발 현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들로 이루어진 시스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창발의 사례로 가장 많이 드는 것은 개미의 경우다. 개미 각각은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각각이 맡은 역할에 따라 화학물질을 분비함으로써 다른 개체들과 서로 연관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개미는 복잡한 개미집을 짓고, 먹이를 구할 때 서로 협력하는 등 하나의 개체 차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창발적 행동을 한다.
사람의 의식(consciousness)도 창발 현상이다. 수많은 신경세포와 시냅스들로 이루어진 뇌가 ‘의식’을 가지는 것은 신경세포 하나하나와 시냅스 각각을 분석한다고 해서 그 작동원리를 알아내기 어려운 전체적인 수준의 현상이다. 유행은 어떤가. 사람들 하나하나에 대해 이해도가 높아진다고 해서 어떤 유행이 언제 발생하고 사그라질지 예측하기 어렵다. 2014년 여름 돌풍을 일으킨 ‘아이스버킷 챌린지‘도 창발적인 현상이다.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SNS를 휩쓸자 그 성공이유에 대한 사후 평가와 분석은 많았으나 사전에 이런 현상이 폭발할 것이라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창발적 현상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선 광범위한 동의와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고 계속 연구중이지만, 창발적 현상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창발적 현상이 왜 중요할까. 시장이 창발적 현상이 발생하는 대표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창발적 현상은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 내거나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의 대폭락 사태나 저예산 영화의 세계적 흥행 돌풍 같은 현상은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언제 어떻게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된 바도 아니다. 창발적 현상들은 질서 속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혼돈 속에서도 발생하지 않는다. 질서과 혼돈의 경계상태인 임계상태에서 발생한다. 시장이 그렇다. 시장은 항상 질서가 지배하는 존재도 아니고 아무런 질서 없이 혼돈에 갇혀 있는 존재도 아니다.
새로운 시장 참여자가 들어오고, 새로운 상품이 시장에 출현하고, 기존의 상품 가격도 시시각각 변하는 등 시장의 한쪽 구석은 항상 임계상태에 놓여 있다. 여기에 어떤 창발적 현상이 일어나면 새로운 질서가 생겨나고 창발적 현상은 역사로 새겨지게 된다. 시장의 임계상태와 창발적 현상의 존재는 대박과 쪽박을 이해할 수 있는 또다른 측면을 시사한다. 그것은 무작위성(예측 불가능성, 운 : 창발적 현상은 예측이 어렵다)과 목적성(의도,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능력 :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시장에 참여한다. 나는 상품을 소비하기 위해 시장에 참여한다 등)이 뒤섞여 있는 곳이 시장이라는 것이다. 시장의 이런 측면이 운과 실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독립적인 사건들은 ‘운’의 영역이라 볼 수 있다. 독립적인 사건들은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결과가 잘 나오기를 기대하려면 기도하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연관된(종속적) 사건들은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그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즉 내 ‘실력’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어떤 행위가 ‘운’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지, ‘실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이 높은지를 판단하는 것은 내가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지 결정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운’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 요소에 큰 노력을 들이는 것은 허망하게 끝날 가능성이 크다.
운과 실력이라는 측면을 좀더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얘기로 이어진다. 운에 영향을 받는 측면이 있다는 것은 그 결과가 정규분포에서의 ‘평균’ 근처에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사위를 던지면 결과의 평균이 3.5에 근접하는 것처럼, 운에 일정한 영향을 받는 활동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평균 근처에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이것이 ‘평균으로의 회귀’ 현상이다. 콘텐츠 비즈니스, 특히 영화나 드라마 같은 흥행 비즈니스의 결과는 규모의 분포가 멱함수 분포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흥행의 결과가 전적으로 실력 요인에만 달려 있지 않고 어느 정도 운이 작용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독립적인 사건처럼 ‘평균으로의 회귀’ 경향도 함께 보이게 된다.
흥행 보증수표라는 유명 연기자들이 출연했다고 해서 항상 성공을 하지 못하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성공을 위해서 큰 돈을 들여 스타를 캐스팅 하고 제작비에 투입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운이 작용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항상 성공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측면들 때문에 운과 실력, 평균으로의 회귀, 스토리텔링 함정, 자기충족적 측면, 비즈니스 모델, 사전대책과 사후대책, 이런 것들이 콘텐츠 비즈니스에서는 실력의 요소(스토리의 매력, 능력있는 제작자, 스타 캐스팅, 적절한 매체와 연결하는 능력, 이목을 끌 수 있는 마케팅 능력 등)만큼이나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